사람은 무엇으로 설계되는가. 말로, 법으로, 혹은 권한으로? 그렇다면 지방은 지금 어떤 것으로도 설계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본 적 없는 그 열쇠-비자-는 단 한 번도 이 땅의 변두리에게 넘겨진 적이 없다. 나는 지방에 산다. 예천에서 시작해 고흥까지, 누군가는 사라졌다고 말하는 그 공간에서 나는 매일 아침 지방소멸을 본다. 그리고 매일 낮, 외국인을 본다. 그는 논에 들어가고, 공장에 들어가고, 아이를 데리고 동네를 걷는다. 우리가 떠난 자리를, 조용히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주민'이라 부르지 않는다. 국가는 말한다. 비자란, 법무부 장관의 권한이라.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준 적 없는 것을 우리는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다만 '필요'로 느낄 뿐인 것, 그것은 우리가 '설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지방은 국가인가? 아니면 단지 국가가 설정한 바깥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이 질문을 회피해왔다. "지방은 스스로 설계할 수 없다"는 전제를, 너무 오랫동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인구는 사라지고 있다. 아이가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고, 공장이 비었다. 사람이 없으니 비자도 없다. 하지만, 비자가 없으니 사람도 없다. 악순환이다. 이 굴레를 끊기 위해 우리는 비자를 설계하려 한다. 국가가 설계하지 않는다면, 지방이 스스로 비자를 발급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광역비자. 이 이름은 낯설다. 그러나 그 개념은 단순하다. 지방정부가 필요로 하는 외국인을 직접 설계하고 추천하며, 중앙정부는 이를 승인하고 쿼터를 관리한다. 즉, 중앙과 지방이 공동으로 외국인을 설계하는 구조, 나는 이것을 "공동사무화"라고 부른다. 비자를 공동으로 만든다는 것은, 외국인을 공동으로 책임지겠다는 의지다. 지금까지는 법무부가 외국인을 배정했고, 지방은 배정된 사람을 맞이할 뿐이었다. 이제는 지방이 먼저 묻는다. "우리는 누구를 맞이하고 싶은가?" 지금 법은 그렇지 않다. '출입국관리법' 제8조는 모든 비자 권한이 법무부 장관에게 있음을 명시한다. 그러나 나는 제8조의2를 말하고 싶다. 그 안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법무부장관은 광역자치단체장의 요청이 있는 경우, 해당 지역을 체류범위로 하는 비자를 발급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요청할 수 있다. 그 요청이 바로, 광역비자 제도다. 반론이 없지 않다. 누군가는 말한다. "비자 발급은 국가 고유의 권한이다." "주정부도 비자권을 갖는 나라는 없다." "지방이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그 말이 옳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도 성숙하지 않았다. 지방소멸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앞에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나라는 성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비자를 지방이 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지방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 대답이 광역비자다. 광역비자는 단지 제도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지방이 국가를 다시 설계하는 첫 문장이다. 나는 그것을 '이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공동체 구성의 권리'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유입'을 논의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정주'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정주는 비자로 시작된다. 비자 없이는 집도, 학교도, 병원도, 주민등록도 없다. 비자 없이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제도가 실현되기 위해선 두 개의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출입국관리법',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 두 법률은 지금 국회에서 잠들어 있다. 그 사이 지방은 더 줄고 있다. 광역비자는, 단지 비자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지방이 국가의 자격을 얻기 위한 입구다. 비자가 중앙의 전유물로 남아 있는 한, 지방은 영원히 중앙이 짜준 거버넌스의 피보팅(pivoting)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비자를 나누는 순간, 지방은 국가와 대등한 파트너가 된다. 나는 비자를 넘겨달라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는, 비자의 일부 권한을. 정확히는, 비자의 설계 권리를. 광역비자는 현실적이다. 광역단체장이 설계하고, 법무부가 쿼터를 설정하고, 지방연구원이 지원하고, 기업과 공동체가 맞이한다. 이 설계는 이미 일부 시범사업('지역특화형 비자')을 통해 실험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앙 설계다. 우리는 더 직접적이고, 더 구조적인 제도를 요구한다. 중앙-지방 공동사무화, 이 네 글자는 법적 이민시대의 실험적 전환점이자, 한국형 이민정책의 새로운 템플릿이다. 지금 우리는 "출산율 0.7의 나라"를 살고 있다. OECD 유일. 그리고 지방은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다. 어떤 이는 묻는다. "출산율이 떨어졌다고 외국인을 받아야 하나?" 나는 되묻는다. "출산율이 떨어졌는데도 외국인을 설계하지 않겠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제 우리는 '받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이제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설계해야 한다. 그 시작이 비자이고, 그 중심이 지방이어야 한다. 나는 광역비자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로 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를 구성하는 권한 중 가장 현실적인 한 조각을 달라는 요구다. 우리는 나라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라를 이곳에서 새로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비자를 넘겨라.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요청이자,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동의다.
2023.07.25.(화)
호명읍 산합리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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