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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형 비자 제도화, 회피인가 혁신인가

특별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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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민정책에서 '지방'이라는 단어는 늘 부차적이었다. 사람은 지역에서 살아가지만, 정책은 중앙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점에서 광역형 비자 시범사업은 하나의 이정표였다. 지역이 외국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처음으로 제도를 '설계'할 수 있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업은 시범으로만 규정되었고, 법은 뒤따르지 않았다. 정책은 시작되었지만, 제도는 정해지지 않았다. 광역형 비자 시범사업은 행정지침이라는 불안정한 틀 안에서, 마치 철로 위에 올리지 않은 열차처럼 출발했지만 방향은 분명치 않았다. 일부 지자체는 이 제도를 통해 외국인 유학생, 산업인력, 정주 가정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일부 지자체는 낮은 평가 점수를 이유로 쿼터가 줄거나 중단될 수 있다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감지해야 했다. 이것이 시범사업의 본래 목적이었는가? 국가가 시범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 이름은 실험과 학습, 제도화를 위한 사전단계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범사업은 종종 정당한 실패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광역형 비자 시범사업에 주어진 평가지표들은 정주지원 실적, 이탈률, 쿼터 충원율 등의 수치에 편중되어 있다. 그 결과 실적이 부진한 지자체는 지원이 아닌 감점을, 피드백이 아닌 축소를 마주한다. 평가는 관리의 수단이 아니라, 사업 종료의 전조로 작용한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구조다. 시범사업은 불확실성을 내재한 정책 도전이다. 평가는 사업 지속의 판단 근거가 아니라, 지원과 역량 강화를 위한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실적이 부족한 지자체일수록, 중앙정부가 더 구체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실험은 실패를 포함하고, 실패는 지원을 요청한다. 이 자연스러운 학습 구조가 부재한 상태에서 시범사업은 정주 정책이 아니라 회피 수단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시범사업을 제도화로 잇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특별법 제정이다. 현재 광역형 비자 시범사업은 "출입국관리법" 및 기존 이민정책 관련 법률의 일반 규정에 따라 법무부가 행정지침과 정책결정으로 추진하고 있다. 즉, 별도의 특별법이나 구체적인 법률 조항이 아닌, 법무부의 신(新) 출입국·이민정책의 후속 조치로 시행되고 있다. 그 법들은 지방정부를 주체로 보지 않는다. 출입은 중앙이 관리하고, 정착은 지자체가 감당한다. 권한은 중앙에 집중되고, 책임은 지방에 흩어진다. 이런 구조에서 제도가 안정될 리 없다. 특별법은 선언이자 구조다. 이 법에는 다음과 같은 핵심 내용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 첫째, 광역지자체가 비자 제도를 '설계'할 권한을 명문화해야 한다. 각 지역은 서로 다른 산업구조와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필요로 하는 외국인 인재의 유형도 상이하다. 이러한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 비자 제도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역 정책의 정당성과 자율성도 침해한다. 지방정부가 제도 설계에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제도의 타당성과 현장성이 확보된다. 둘째, 법무부는 비자 발급의 최종 심사기관이 아니라, 광역지자체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력기구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중앙과 지방의 역할은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었고, 지방의 참여는 행정 지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방소멸위기 시대에 이민정책은 중앙정부 단독의 영역이 아니다. 공동관리체계 속에서만 제도는 정당성을 얻는다. 셋째, 현재 적용되고 있는 평가지표는 감점이 아니라 학습을 위한 동행 평가로 바뀌어야 한다. 실적이 낮은 지자체는 지원과 컨설팅의 대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실험을 실패할 자유가 없는 시범사업은 존재할 수 없으며, 실패 없는 제도는 진화를 멈춘다. 넷째, 정주사회 형성을 위한 지방정부의 실질적 역할을 보장하려면, 법은 예산과 인력을 함께 약속해야 한다. 언어교육, 의료지원, 교육 연계, 사회통합 프로그램 등은 이주사회의 핵심 인프라다. 이를 위한 안정적인 국비 확보와 조례 권한 보장이 병행되어야 한다. 정책은 언어로 시작한다. 그 언어가 모호할수록 제도는 흔들린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름, '광역형 비자'. 그 '형(型)'이라는 단어 하나에 제도의 불확실성과 국가의 의지 부족이 드러난다. 이제는 이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광역형 비자는 실험이 아니라, 정책이다. 형식이 아니라 철학이다. 제도는 언어를 필요로 하고, 언어는 법을 통해 완성된다. 광역형 비자는, 특별법의 토대 위에서 '광역비자'라는 분명한 이름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이 제도에 대한 국가의 최종 응답이어야 한다.

2025.05.09.(금)
북쪽으로 달리는 KTX 안에서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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