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지도에서 사람이 사라졌다. 나는 그걸 본 적이 있다. 동영상을 만들었다. 20년간의 인구 데이터를 시계열로 연결한 영상. 숫자들이 점점 줄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워졌다. 나는 그걸 '소멸'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건 '증발'이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존재로 기록하지 않는 방식의 실종. 나는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묻는다. "도시는 사라지는데, 무엇을 계획한단 말인가?" 이 나라는 계획을 한다. 그러나 '줄어드는 도시'를 위한 계획은 없다. '살아남는 사람'을 위한 계획도 없다. 그들은 단지, 줄어드는 수치가 되어 간다. 그리고 남는 건, 제도도, 희망도 없는 마을 하나.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나는 이 말을 무겁게 쓰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기로에 섰다. 두 갈래의 길. 하나는 '축소'의 길. 하나는 '환대'의 길. 축소의 길은 쉽다. 예산을 줄이고, 학교를 닫고, 복지 기준을 내리고, 의료 접근을 줄이고, 공공시설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 없던 듯 줄어드는 공동체를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적이지 않다. 그것은 설계가 아니라 포기다. 나는 다른 길을 말하고 싶다. 나는 그것을 '이민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싫어한다. "이민이라니, 아직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다시 묻는다. "그럼, 언제입니까?" 당신이 말하는 그 '때'는 이미 지나갔다. 이민은 이미 왔다. 그들은 마을에 있다. 공장에 있다. 학교에 있다. 어린이집에도 있고, 노인요양시설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잠깐'이라 부른다. 잠깐 있는 사람, 잠깐 일하는 사람, 잠깐 머무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체류자'라 부른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이 땅에서 아이를 낳고 있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말한다. "그들을 공동체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대답은 없다. 국가는 여전히 '체류 허가', '고용 허가', '기간 연장'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다면, 이 마을은 다시 돌기 시작할 것이다. 그 시작은 하나의 제안이었다. 나는 그것을 광역비자라 부른다. 기존 비자를 폐지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선택지를 하나 더 주는 것이다. "나는 경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전남에서 정착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국가가 응답하는 구조. 그 말에 지자체가 책임지는 구조. 비자를 설계하자. 지방이 사람을 유치하자. 그리고 함께 살게 하자. 사람들은 묻는다. "비자는 법무부의 권한 아닌가요?" 맞다. 그렇기에 나는 말한다. 권한을 나누자고. 출입국은 중앙이 한다. 그러나 정착은 지방이 한다. 그 두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제도. 그게 바로 광역비자다.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선택이 의미 있으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설계했다. 광역비자를 선택한 사람에게 그 지역의 혜택이 주어진다. 주거, 정주, 정착 인프라. 그러나 반납하면, 혜택도 사라진다. 그래서 선택이다. 이 제도는 법무부 훈령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법을 요구한다. '광역비자 특별법'. 왜? 정주형 이민정책을 국가 계획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야 지자체가 중기계획을 세울 수 있고, 예산을 편성할 수 있고, 공공기관이 협업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 이상적인 제안 아닙니까?" 나는 말한다. 이상은 지금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니까. 나는 더 늦기 전에 말하고 싶다. 지방은 죽어간다. 그러나 그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다. 그건 설계되지 않은 죽음이고, 책임지지 않은 방치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지금까지 사람을 설계하지 않았는가?" 도시는 설계했지만, 사람은 설계하지 않았다. 계획은 세웠지만, 삶은 남겨뒀다. 이제는 거꾸로 해야 한다. 삶을 먼저 설계하고, 계획을 그 위에 얹어야 한다. 그 삶이란, 이주민이기도 하고, 청년이기도 하고, 돌봄 노동자이기도 하고, 노인이기도 하다. 그들 중 누구도 정책의 중심에 선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우리는 설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국가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지방이 다시 나라가 되어야 한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낯설다. 그러나 그 어원을 들여다보면 '다시 돌린다'는 뜻이다. re-volvere. 우리는 지금 멈춘 사회를 다시 돌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방의 혁명이고, 이민사회의 시작이고, 광역비자의 이유다. 나는 그 제도를 썼다. 나는 그 법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법안을 함께 만들 사람을 찾고 있다. 당신은 함께할 것인가?
2024.11.26.(화)
2024 지역인재혁명포럼 토론 후 적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