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갔다. 그곳엔 더는 아이가 없었다. 운동장은 조용했고, 유모차 대신 휠체어가 지나갔다. 약국은 붐볐고, 산부인과는 폐업했다. 나는 그곳을 '고령사회'라 부른다. 그러나 그 말은 부정확하다. 사회는 나이 들지 않는다. 늙은 것은 우리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구조다. 국가는 말한다. "고령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틀렸다. 그 말은 말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그 누구보다 빨리 늙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수많은 보고서를 봤다. 그 안엔 '대응책'이 있었다. 출산장려금, 육아휴직 확대, 고령친화산업 육성, 실버 일자리 창출 ... 그러나 나는 의심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누가 그 정책을 설계했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정책은 고령을 '삶'으로 본 적이 있는가?" 고령은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고령을 '위기'로 말하고, '부담'으로 기록한다. 그리고는 침묵한다. 그들의 삶, 감정, 노동, 존엄, 가능성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침묵이 불편했다. 그래서 말하기로 했다. 말하지 않는 사람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 정책이라면, 이 칼럼이 정책의 첫 문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질문한다. "왜 고령은 늘 국가의 대상이고, 한 번도 국가의 주체가 된 적 없는가?" 노인은 표가 없다. 노인은 설계자가 아니다. 노인은 계산서 위에 올라가는 숫자이고, 복지 예산의 항목일 뿐이다. 그렇게 노인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책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책은, 늙는다. 나는 고령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늙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오래 살아온 생의 축적이다. 그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존재를 정책이 잊었다는 것이다. 이민정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고령은 없다. 늘 '청년 이민자', '생산가능 인구', '노동력 대체' 이 단어들 속에서 고령은 구조의 문제이지, 주체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이민정책은 고령정책이다. 왜냐하면 고령은 이 사회의 가장 많은 인구고, 그들이 없는 지역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고령을 '가능성'으로 본다. 이 가능성은 숫자가 아니라, 설계 방식의 전환에서 온다. 노인은 떠나는 존재가 아니다. 정착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정주 전략에서 고령은 핵심이 된다. 나는 이민자를 고령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착의 구조를 고령 인구와 이민 인구가 함께 만드는 것. '고령 + 이민'. 이 수식은 낯설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다. 나는 이것을 이중복원 모델이라고 부른다. 삶의 경험을 가진 고령 인구와 삶을 새로 시작하는 이민자가 함께 거주하고, 돌보고, 일하는 구조. 예를 들어, 노인 돌봄을 이민자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노인이 '돌봄 공동체'의 주체로 함께하는 구조. 그것은 마을이다. 경북의 청도나 영양, 의성이나 군위에 그 마을을 만들 수 있다. 그곳에는 노인과 이민자가 함께 농사를 짓고, 공동주거를 하며, 한글과 모국어를 교차로 배우고, 한 명은 손자를 돌보고, 한 명은 논밭을 간다. 나는 이것을 '고령의 설계권'이라 부르겠다. 그러나 제도는 없다. 고령자는 비자 대상이 아니고, 이민자는 정주자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을 바꿔야 한다. 비자를 고령과 연결하고, 이민을 공동체와 연결해야 한다. 그 법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령의 삶도 국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광역비자 특별법'이 고령사회의 새로운 설계도이길 바란다. 이 법은 외국인을 위한 법이 아니다. 이 법은 고령 인구를 국가의 '공동체 설계자'로 다시 위치시키는 법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한 마을을 상상한다. 그 마을에는 출생률이 0인 여성도, 생산성이 없는 노인도,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도 있다. 그러나 그 마을은 산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로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마을의 이름은 아직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고령사회 대안 모델이라 부른다.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이 사회는 늙어가는가?" 나는 대신 묻는다. "이 사회는 늙는 것을 설계할 수 있는가?" 정책이 늙지 않도록, 정책이 사람을 기다리지 않도록, 정책이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먼저 말하도록, 이 칼럼은 존재한다.
2025.01.21.(화)
제1차 상지강원포럼 토론 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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