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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미 살고 있었다

경계 위의 고려인동포와 지방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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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빌라 한 동 전체가 그들의 것이 되었을 때였을까, 혹은 어느 날 한 아이가 유창하지 못한 한국어로 "선생님, 저도 여기서 태어났어요"라고 말했을 때였을까. 나는 영천에 다녀왔다. 보고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러 갔다. 지방소멸의 대책이 아닌, 지방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곳에는 고려인동포가 있었다. 가족이 있었고, 아이가 있었고, 언어도, 제도도, 소속도 없는 이방인 아닌 이방인들이 있었다. 영천시 공무원은 조심스러웠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고려인을 유도한 적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말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한 것은 우연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우려'를 이해한다. 집단 정착이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주민 민원, 다세대 주택의 슬럼화, 소음과 쓰레기, 언어와 소통의 단절. 행정이 감당하기엔 너무 빠르고, 너무 복잡하고, 너무 정체불명의 변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를 둔다. "정착보다는 자연유입이 낫다"고. "유형1(우수인재)은 되지만, 유형2(외국국적동포)는 어렵다"고.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틈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공무원은 제도적으로 설계된 존재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공무원이 조심하는 사이, 사람은 방치되었고, 아이는 혼란 속에 자랐다. 어떤 아이는 러시아어도 하지 못했고, 어떤 아이는 한국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국어"를 잃은 세대였다. 모국은 없고, 말은 섞여 있고, 교실에서 혼자 있고, 출입국 서류에는 가족이 나뉘어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어디에 속해 있느냐." 그러나 동시에 내게도 묻는다. "그 아이를 우리는 어디에 속하게 할 것인가." 장성우 센터장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불만이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자신의 공동체가 '관리대상'으로 호명되는 방식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정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말은, 제도를 설계한 적 없는 사람들의 언어였다. 나는 행정의 언어와 민간의 언어 사이의 간극을 보았다. 공무원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적을 부풀린다"고. "보조금을 노린다"고. 하지만 장성우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했다. 누구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책은 그들 사이에 서 있지 않았다. 정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정착'이라는 단어를 의심하게 되었다. 정착은 행정이 좋아하는 단어다. "정착지원", "정착사업", "정착패키지"... 하지만 고려인동포는 이미 살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원이 아니라, 존재의 승인이다. 그들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정책은 "들어온 사람"이 아닌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 나는 공공기관에 연락했다. K-드림외국인지원센터, 영천시가족센터... 그들은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한다. "예산이 부족합니다." "인력이 없습니다." "지속이 어렵습니다." 나는 그 말에서 절망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공공이 감당하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 말 다음에 이어진 침묵에서, 나는 '민간'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했다. 그럼에도 행정은 민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도의 본성이다. 그러나 그 본성은, 지금 사람을 놓치고 있다. 장성우는 혼자 싸운다. 예산 없이, 사람 없이, 오직 필요에 의해. 가정을 돕고, 아이를 돌보고, 사람을 이어 붙인다. 그것이 정책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보고서에 담기지 않더라도. 나는 그를 기관이라 부르지 않고, 시민이라 부른다. 그리고 지금 이 정책엔 시민이 필요하다. 문제는 정주지원이 아니다. 문제는 거주지다. 문제는 단지 집이 있는 게 아니라, '사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고려인 가족은 빌라에 산다. 하지만 그 빌라는 그들에게도, 지역 주민에게도 집이 되지 못한다. 경계는 늘 담벼락에 선다. 그 담벼락을 허물기 위해, 공공임대와 중개시스템이 필요하다. 공동체 조율자가 필요하다. 나는 제안하지 않는다. 나는 이야기한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집을 구했고, 학교에 아이를 보냈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행정구역에는 속하지 않는다. 나는 묻는다. 우리는 그들을 언제 '구성원'이라 부를 것인가. 지금, 영천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려를 이유로 뒤로 물러설 것인가, 책임을 이유로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나는 이 결정을 공공과 민간이 함께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불신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보조금의 언어를 버리고, 사람의 언어로 돌아와야 한다. 정책은 동반자의 언어로 설계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의 고려인 아이들은 지금 '경계 위의 아이들'이다. 그들은 '우리' 안에 있지만, 여전히 '우리' 바깥에 있다.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줄 것인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의무를 질 것인가. 나는 정책이 대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대답은 지금 여기,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2025.04.03.(목)
호명읍 山合里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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