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천에 살고 있다. 서울에서 세 시간 걸린다. 날이면 날마다 빠져나가는 사람들, 남아 있는 노인들, 아무도 오지 않는 버스 정류장. 길가에 서 있는 돌담집은 그대로다. 다만 집 안에는 사람이 없다. 집이 집이기를 멈춘 곳에서, 나는 이주자를 처음 보았다. 그는 이름도 없이 '외국인'이었다. 마을 어귀의 농장에서 딸기를 땄고, 쌀을 날랐고, 묵은 배수구를 맨손으로 뚫었다. 주민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들 없으면 못 살아"라고 했고, 또한 "그래도 그 사람들은 다르다"고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젊음이 다르고, 노동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이 없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누구를 부를 수 있을까. 사람이 없는 마을, 사람이 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만든 현실이다. 나는 지방연구원이 되었다. 인구지표를 보기 시작했다. 모니터 속에서 숫자들이 죽어갔다. 여성 한 명이 없어도, 인구가 늘어나는 곳이 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그곳엔 딸기가 있었고, 배수구가 있었고, 그 옆에서 일하는 외국인이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지방소멸지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 지표는 말하지 않는다. 누가 와서 일하고, 누가 아이를 낳고, 누가 세금을 내는지를. 그저 '내국인 여성의 수'만을 본다. '오지 않은 미래'만을 기다리며, 이미 와 있는 사람은 보지 않는다. 나는 그 지표를 내려놓는다. 그 대신, 현실을 보기로 했다. 나는 말했다. 광역비자를 도입하자고. 지역이 직접 설계하고, 지역이 직접 책임지자고. 법무부는 놀랐다. "비자를 설계하겠다고요? 지방이?" 나는 말했다. "당신들이 하지 않기에, 우리가 하겠다." 그들은 말했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되물었다. "감당해 본 적 있습니까?" 이제는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감당하는 척만 했다. 이주민을 불렀고, 체류만 허락했고, 정착은 허락하지 않았다. 가까이 있었지만, 이웃이 되게 하지는 않았다. 사람을 부르면서도, 공동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그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곳 사람'이다. 이 경계는 깨지지 않았다. 법은 침묵했고, 제도는 돌아보지 않았으며, 정책은 눈을 감았다. 나는 노신의 글을 읽었다. "광인일기"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사람'이 이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침묵이 만든 먹음, 우리의 무관심이 허락한 소멸.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한다. 이민은 필요가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지방은 생존을 구걸하지 않는다. 지방은, 다시 시작할 자격이 있다. 나는 예천에 살고 있다. 마을회관 앞 국기게양대엔 바람만 불고, 학교 운동장엔 아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여기에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면, 그 부모는 '우리가 아니었던 사람'일 수 있다. 그 아이는 우리의 마지막 기 회일 수 있다. 우리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출생신고를 거부할 것인가? 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인가? 언어를 가르치지 않을 것인가? 다른 동네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또 말한다. "광역비자를 달라." 그것은 단지 '외국인 출입국'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어디까지 자신을 열 준비가 되었는가의 문제다. 나는 다시 말한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한 번 더, 이 땅 위에 집이 남아 있고, 그 집에 사람이 들어설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우리는 그를 이웃이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주사회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설계이기 때문이다.
2025.05.01.(목)
호명읍 山合里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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