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이 넘치던 시절의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신문 구석의 숫자가 하나 줄었다. 그다음 달에는 지도에 점 하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숫자도, 점도, 아무 말이 없다. 거기에 누가 살았는지조차 잊혀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구 '소멸'이다. 그러나 나는 '소멸'이란 단어조차 사치스럽다고 생각한다. '소멸'이란 남아 있는 무엇인가가 자신을 말려가며 사라지는 것을 뜻하겠지만, 내가 본 것은 단지 '증발'이었다. 자취도 없이, 소리도 없이, 이유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인간. 그것은 이성과 숫자의 세계에서조차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이번 글은 '비자'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비자라는 단어에 위장된 체류 허가의 문제, 정주권의 문제, 더 나아가'인간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의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외국인 정책은 체류 중심이다. 비자가 허용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체류다. 정주가 아니다. '머무르되, 정 붙이지 말라.' 이것이 현재의 체계다. 그래서 '광역비자'는 위험하다. 지금 체계에서 보면 그것은 허점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바로 그 허점이야말로, 사람이 정착할 틈"이라고. 광역비자는 2022년 9월 경상북도가 제안한 제도다. 법무부 장관에게 국한된 비자 발급 권한을 일부 지역정부가 공유하자는 것이다. 중앙은 법령과 절차를 관리하고, 지방은 필요한 외국인을 설계하고 추천한다. 말하자면 중앙-지방의 '공동사무화'다. 이 말은 '지방이 권한을 탈취했다'가 아니다. 이 말은 '지방이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출산율이 0.7인 나라에 살고 있다. OECD에서 유일하다. 지방의 기업은 사람을 찾을 수 없고, 대학은 신입생이 0명이다. 농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 없이는 농사도, 교육도, 산업도 없다. 이것은 사회의 '기능 부전'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도가 없다. 마음이 없다. 무엇보다도, 상상력이 없다. 광역비자는 단지 비자 제도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외국인을 단기 노동자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갈 존재'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의 부속을 갈아 끼우는 일이 아니라, 설계도를 다시 그리는 일이다. 광역비자 제도를 말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지역특화형 비자(F-2-R, F-4-R)와 뭐가 다르냐"고. 나는 그 질문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의 '이름'만을 비교한 질문이다. 광역비자는 '제도를 해석하는 권한' 자체를 바꾸자'는 제안이다. 지역특화형 비자는 법무부가 기획하고 설계한 제도다. 중앙이 만든 틀에 지방은 맞춰야 한다. F-2-R은 외국인 우수인재를, F-4-R은 외국국적 동포를 정주 대상으로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시도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여전히 '인정'과 '추천'의 권한을 지방정부에 주지 않는다. 지역은 단지 '지정된 곳'일 뿐, 주체가 아니다. 광역비자는 그것을 뒤집는다. 지방이 먼저 설계하고, 대상자를 정하며, '이 지역은 이 조건으로 이 사람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하는 구조다. 다시 말해, 이 제도는 지방이 외국인을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정치적 선언이다. 그 선언은 권한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할 자격에 관한 선언'이다. 지금의 외국인 관련 법은 11개 정도다. 그러나 그 법 어디에도 '정주'라는 단어는 없다. 모두 '체류'다. 3년 체류, 5년 체류, 영주 자격 요건. 그러나 영주라고 해도, 국적이 아니면 복지 접근도, 교육 참여도 제약된다. 이 틀 속에서 광역비자는 '정주'를 제도 안에 명시적으로 담은 최초의 제안이 된다. 그러나 이 제도는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다. '광역비자 특별법'이 있어야 한다. 특별법이 없으면, 이 모든 구조는 훈령이나 고시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법이 없으면 계획이 없고, 계획이 없으면 예산이 없다. 예산이 없으면 행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범사업이 훈령 단계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훈령으로는 공동체를 설계할 수 없다. 특별법은 다섯 가지 구조를 담아야 한다. 첫째, 지방정부의 이민정책 권한 분산. 둘째, 정주형 비자 발급 기준 명시. 셋째, 종합계획의 법정계획화. 넷째, 중앙-지방 공동사무화 조항의 제도화. 다섯째, 외국인 정주 인프라(주거, 교육, 의료, 고용) 연계 의무화. 이 다섯 가지는 단지 법 문장으로서의 조항이 아니라, '대한민국 이민정책 2.0의 설계도'다. 이민을 인력정책이 아닌 인구정책으로, 인구정책을 다시 지역공동체 정책으로 재구성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구조다. 나는 이 법의 이름을 '지방소멸위기 극복을 위한 광역사증 발급에 관한 특별법'이라 지었다. 그러나 어떤 이름이든 상관없다. 그것이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틀이 된다면. 이름은 나중 문제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제도가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다시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방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비자가 허가하는 것은 '사람의 이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허가해야 할 것은 '삶의 정착'이다. 그래서 나는 비자의 권한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꺼내고 싶다.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가족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는가? 그의 자녀가 지역의 학교에서 자라나고, 그의 배우자가 인근의 요양시설에서 일하고, 그의 부모가 지역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어야, 그는 '이곳에 살겠다'고 말할 수 있다. 비자의 허용 범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주 공동체의 품이다. 이 부분에서 광역비자는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단순히 개인의 체류 자격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가족 단위 정주'라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가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떠날 수밖에 없다. 남겨진 지역은 다시 빈집만 남는다. 정책은 체계다. 그러나 정책은 윤리이기도 하다.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결정은, 그를 우리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정치적 선택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 선택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에 대한 '윤리적 선언'이다. 이 선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지방은 버텨주지 않는다. 고령화는 되돌릴 수 없고, 출산율은 반등하지 않는다. 도시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그 사라짐이 '자연사'가 아니라 '방치'라는 점이다. 나는 더 이상 '계획 없는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 소멸은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소멸의 언덕에서 '정주의 마을'을 다시 일굴 것인가. 광역비자는 그 선택의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비자가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를 묻는 체류의 문장이라면, 광역비자는 "함께 살 준비가 되었는가"를 묻는 공동체의 문장이다.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쓰고 싶다. 그 문장을 함께 쓸 동료들을 찾고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당신도 그러하길 바란다.
2025.05.03.(토)
호명읍 山合里 비오는 봄날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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