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 태어난 곳인가, 살고 있는 곳인가, 아니면 죽어서 묻힐 곳인가? 나에게 고향은 선택하는 곳이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겠다고, 그곳에서 미래를 꿈꾸겠다고 결심한 곳이다. 그리고 그 결심이 받아들여진 곳이다. 나는 스무 편의 칼럼을 썼다. 절반은 보고서의 차가운 문장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내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언어였다. 그 언어는 '정책'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객관성'이라는 칼날로 늘 도려내졌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내게 속삭였다. "기침하지 말고, 외쳐라." 그 한마디가 죽은 보고서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우리는 말했다. "한국인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는 말했다. "일할 수는 있지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말했다. "체류는 허락하지만, 정주는 불허한다." 이것이 70년 동안 이 나라가 이방인에게 건넨 유일한 문장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고향을 선택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고향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그들은 체류할 수 있을 뿐이다. 머물 수 있을 뿐이다. 살 수는 없다. 비자 서류에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없다. 오직 '동반'이라는 단어만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배우자는 '동반자'이고, 자녀는 '동반자'이며, 노부모는 '동반자'일 뿐이다. 그들은 언제나 주체가 아닌 부속물이었다. 이 칼럼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은 특별법이 아니었다. 그 주인공은 이 법이 없어서 오늘도 '체류'만을 허락받는 어떤 가족, 어떤 아이, 어떤 노동자였다. 그들은 단 한 번도 국가로부터 "살아도 됩니다"라는 문장을 들은 적이 없다. 이 스무 편의 칼럼은 그 문장을 대신 써주기 위해 시작되었다. "당신은 여기 있어도 좋습니다." "당신은 우리 공동체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가족입니다." 이 세 문장이 없는 비자는 단지 종이일 뿐이다. 이 세 문장이 없는 이민정책은 단지 관리 시스템일 뿐이다. 이 세 문장이 없는 나라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다. 광역비자 특별법은 단순한 행정절차가 아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혁명이다. 대한민국이 지난 70년간 스스로를 정의해온 방식에 균열을 내는 시도이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노력이다. 지방소멸이라는 위기가 이 질문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기만이 이 질문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인구감소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중앙정부는 통계를 보고도 외면했고, 지방정부는 현실을 보고도 침묵했다. 나는 현장을 다녔다. 경북의 작은 마을에서, 전북의 농촌에서, 강원도의 산골에서 나는 보았다. 그들은 이미 시작했다는 것을. 중앙정부의 허락 없이도, 법의 뒷받침 없이도, 그들은 이미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온 아내와 필리핀에서 온 노동자와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이미 그 지역의 시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단지 법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었다. 제도가 그들의 존재를 '임시'로만 규정할 뿐이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정의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결정하는 힘이다. 지금까지 그 '우리'를 정의하는 권한은 오직 중앙정부에만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지방도 그 권한을 가져야 한다. 아니, 지방이야말로 그 권한을 가져야 한다. 내가 제안한 광역비자 특별법은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확장이다. 정체성의 분권화이다. 국가의 정의를 다양화하는 시도이다. 광역비자 특별법은 그 간극을 메우는 법이다. 현실과 제도 사이의 깊은 틈새를 메우는 법이다. 우리는 이미 다민족 사회에 살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2025년,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그 정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중앙집권의 낡은 길을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지방분권의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인가? 과거의 언어로 계속 말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언어로 말하기 시작할 것인가? 체류를 말할 것인가, 정주를 말할 것인가? 통제를 말할 것인가, 환대를 말할 것인가? 나는 정주가 범죄가 되는 도시에서, 이민이 예외가 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비자는 도장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서명이어야 한다. 끝으로,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이 오늘 만나는 수많은 타인 중 한 명이 그저 여기 살고 싶은 외국인이라면, 당신은 그에게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나는 이제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을, 법률 제1조에 쓸 것이다. "이 법은 이 땅에 함께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칼럼 시리즈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의 마지막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문장이 다음 시대의 첫 문장이 되리라. 정주의 시대가 온다. 그 시대는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2025.05.04.(일)
호명읍 山合里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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