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령은 종이다. 법은 칼이다. 종이는 바람에 날리고, 칼은 살을 베어낸다. 나는 묻는다. 이 나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람에 날리는 종이인가, 살을 베어내는 칼인가? 광역비자 제도는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훈령'으로만 존재한다. 관료의 서랍 속에, 부처의 내부문서로, 임시방편의 '정책'으로만. 그것은 법이 아니라 규정이고, 약속이 아니라 선언이다. 대통령이 바뀌면 사라지고, 장관이 교체되면 휴지가 된다. 사람은 그 제도에 의지해 머물러도, 제도는 사람에게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환대인가? 왜 그들은 법을 만들지 않는가? 이유는 단 하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다. 훈령으로 내리면 "시범사업"이라 말할 수 있고, 실패하면 지방정부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입법은 칼이다. 칼은 쥐면 손을 베인다. 그래서 그들은 쥐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입법이 위험하기 때문에, 입법이 필요하다. 지방정부는 지금 제도의 사용자일 뿐이다. 서울의 관료가 설계한 제도를 '운영'하는 데 그친다. 그들은 탄식한다. "우리는 재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본다. 그들에게는 언어도 없었다. 설계할 수 있는 언어, 법률을 만들 수 있는 문장, 그 문장이 없었다. 광역비자 특별법은 말한다. "지방이 설계자가 되겠다." 지방에게 자율의 법률 문법을 돌려주라. 인구정책은 사회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헌법정치다. 사람의 정주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 방식의 문제다. 광역비자는 단순한 지방소멸 대응책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인구구성권 구조를 뒤엎는 정치적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은 법으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헌법은 정주를 말하지 않는다. 아니, 이 나라의 어떤 법률도 '정주'라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체류를 말하고, 거주를 말하고, 등록을 말하지만, '정주'라는 단어가 없다.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법적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비자 제도는 말한다. "당신은 머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그것은 체류이지 정주가 아니다. 하지만 특별법은 다르게 말해야 한다. "당신은 이 지역에 살아도 좋습니다. 당신이 이 지역을 공동체로 여기는 순간, 우리도 당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합니다." 출입국관리법, 외국인근로자법, 재외동포법... 이 모든 법은 통제의 언어로 쓰여 있다. 그것은 이주민을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 그러나 광역비자 특별법은 달라야 한다. 그 법은 "이주민은 함께 도시를 만드는 시민이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이 선언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관리 시스템만 존재할 뿐,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나라의 현행 법제도는 "정착"이 아니라 "퇴거"를 전제로 한다. 모든 외국인은 언젠가 떠날 것이라 가정한다. 그래서 '체류'라는 말을 쓰고, '체류기간'을 정한다. 모든 법조항이 그들의 퇴거를 상정하며, 따라서 함께 살 사회를 준비하지 않는다. 이것이 환대인가? 광역비자 특별법은 단호히 말해야 한다. "이들은 떠나지 않는다. 떠나지 않아도 된다." 이 한 줄의 선언을 위해서라도 입법은 필요하다. 지금까지 지방은 "인구 유치"만을 말해왔다. 유치 이후의 삶, 정착의 질, 지역사회 참여, 문화적 전이, 자녀의 학교 문제는 부차적이었다. 이제 지방이 주도권을 쥐고 "정착과 공동체의 윤리"를 말해야 한다. 그 시작은 입법이며, 입법은 정치의 선언이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국민을 출생과 혈통으로만 정의해왔다. 하지만 이제 국가가 아니라 지역이 묻는다. "우리가 우리 땅에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가 가족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정치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법률이야말로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언어다. 광역비자 특별법은 단지 비자를 발급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처음으로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법으로 말하는 시도다. 공동체는 혈통이 아니라 정주의 의지로 정의된다. 국가는 태어난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함께 살기로 결심한 자들의 약속이다. 2025년,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는 묻게 될 것이다. "이 나라의 공동체는 누구로 구성되는가?" 그가 중앙만을 바라본다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지방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방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을, 그 혁명적 시도를 법으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믿는다. 그 법률을 쓰는 손끝에, 이 나라의 정주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2025.05.04.(일)
호명읍 山合里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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