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는 누구의 것인가? 권력의 도장인가, 아니면 사람의 생명인가?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오래 배회했다. 국가의 도장은 찍히고, 사람의 운명은 결정된다. "당신은 여기 있어도 좋다." 이 네 단어가 비자다. 그런데 누가 그 글자를 발설할 권리를 가지는가? 법무부인가, 출입국관리소인가, 아니면 이름 모를 공무원 한 사람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 외국인이 살 곳은 서울도 아니요, 중앙정부도 아니다. 그는 밭이 있는 농촌에서, 공장이 있는 산업단지에서, 학교가 있는 교육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 지역의 시장은, 마을의 이장은, 함께 살아갈 주민들은 '당신은 여기 살아도 좋다'를 말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권력의 약탈'이라 부른다. 지방은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다. 중앙은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다. 이주민이 겪는 불행도, 지역이 겪는 혼란도 모두 지방정부의 탓이 된다. 하지만 그 불행과 혼란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서울에만 있다. 광역비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행정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중앙집권국가에 대한 항변장이다. "지방정부가 자신의 구성원을 직접 선택하게 하라."는 선언이다. 나는 이 제안을 처음 내놓았을 때,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국민 형성의 권리를 지방에게 돌려주자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과연 서울의 관료들만이 '대한민국 국민'을 정의하는가? 부산의 어부, 전주의 농부, 경주의 장인들에게는 그 권리가 없는가? 나는 단호히 말한다. 국민을 만드는 권한, 이웃을 결정하는 권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권한이 지방에도 필요하다고. 지방정부는 지금까지 관찰자였다. "법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우리는 따르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 법은 누구를 위한 법인가? 그 법은 당신의 마을에 적합한가? 그 법은 당신의 짐을 덜어주는가, 아니면 짐을 더하는가? 광역비자는 말한다. "이제 당신이 직접 그 법을 쓰라." 이것은 단순한 행정권한이 아니다. 이것은 헌법적 혁명이다. 왜냐하면 비자는 사람이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문서이고, 그 문서를 쓰는 권한은 국민을 구성하는 권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비자 설계권'이라 부른다. 지방정부가 직접 체류 조건을 정하고, 필요한 인재를 선택하고, 정주 서비스의 수준을 결정하는 권한이다. 이것은 더 이상 중앙정부의 하위 정책이 아니라 지역 주권의 선언이다. 지금까지 지방정부는 '행정 하청업자'에 불과했다. 그들은 중앙이 정한 매뉴얼대로 외국인을 '관리'했다. 하지만 광역비자의 세계에서, 지방정부는 운명의 주인이 된다. 그 정부는 묻는다. "우리 지역에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누구와 미래를 함께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도시의 헌법을 다시 쓰는 행위다. 나는 이미 본다. 경북의 작은 시군들, 전북의 농촌 마을들, 강원의 한 교육청이 국가의 명령 없이도 그들만의 공동체 헌장을 쓰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행동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법으로써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 그들이 선택한 공동체를 '정상'으로 선언하는 것. 그들의 선택이 국가의 정책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광역비자 특별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한민국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변화하는 결정적 지점이다. 지방은 더 이상 정책의 수요자가 아니다. 지방은 이제 헌법의 생산자다. 국민을 다시 정의하는 권력의 주체다. 이제 나는 묻는다. 2025년 6월, 새 대통령이 탄생할 때, 그는 이 권력을 과연 내려놓을 용기가 있을 것인가? 아니면 100년 묵은 관료제의 유혹에 다시 빠질 것인가?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누가 진정 지방을 위한 대통령이었는지를.
2025.05.04.(일)
호명읍 山合里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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