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는 선이 없다. 아스팔트에 선을 긋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선은 존재한다. 한 쪽엔 지역민, 다른 한 쪽엔 이주민. 한 쪽엔 '정상가구', 다른 쪽엔 '외국인 밀집지대.' 행정구역은 같지만, 우리는 그 구역을 나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나는 질문한다. 그 선은 누가 그었는가? 시청인가? 도시계획가인가? 주민인가? 아니다. 그 선은 두려움이 그었고, 혐오가 굳혔으며, 무관심이 유지하고 있다. 나는 이 선을 본 적이 있다. 봉화군 외곽, 베트남에서 온 이주여성이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던 마을 어른이 조용히 말했다. "거긴 니들이 서있을 자리가 아냐." 그 문장은 표지판도 아니었고, 지침서도 아니었지만, 그 문장이 선이었다. 그 이후 그 어머니는 길 건너편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공간은 이렇게 말없는 폭력의 구획이 된다. 우리는 혐오를 말하지 않는다. 그저 구획한다. 그리고 그 구획은 계획도 없이, 법도 없이, 하지만 정확하게 작동한다. 이제 나는 광역비자 제도의 가장 급진적인 기능을 다시 말한다. 그것은 구획을 허무는 제도이다. 그 제도는 말한다. "당신은 어디서든 살아도 된다." 그리고 지방정부는 말한다. "우리도 당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공간윤리의 재편성이다. 나는 여기에 도시계획이 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차별이 설계되지 않도록 공간을 진단할 것. 외국인 집단 거주지역. 쓰레기처리장 인접지. 대중교통 배제구역. 의료·교육·문화시설 불균형 분포. 모두 구획된 혐오의 징표다. 의도된 환대를 설계할 것. 이주민과 지역민이 함께 쓰는 시설. 국적을 넘어선 공동주거지. 아이들의 혼합 교육 공간. 의도된 계획만이, 무의식적 혐오를 이길 수 있다. 차별 지표를 도시계획 도면에 반영할 것. 행정도면, 지구단위계획, 주민참여계획에 '차별 검토표'를 의무 반영하라. 건축, 조경, 교통계획의 모든 도면에 '소외구역'이 존재하지 않는지를 명시하라. 그리하여, 이제 도시계획은 물리적 공간의 배치가 아니라 공동체 감각의 재설계여야 한다. 나는 믿는다. 구획된 혐오를 허무는 것은 법이 아니라 계획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말없이 차별을 지워내고, 조용히 환대를 설계하는 기술이어야 한다. 도시계획에서 이주민은 '외국인 지구'의 거주자가 아니라 도시 전체의 시민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들은 한국인과 분리된 삶이 아니라, 융합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의 도시는 어떤가? 외국인 밀집지역은 대개 도시 외곽, 산업단지 인근, 노후 주거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도시의 중심부, 좋은 학군, 깨끗한 환경에서 배제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설계된 차별이다. 나는 경북 안동의 한 지역에서 본 것을 잊을 수 없다. 베트남 이주민이 모여 사는 곳은 시내버스가 하루에 세 번만 다녔다. 그리고 그 정류장은 주택가에서 1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겨울에는 그 거리를 걸어야 했고,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면 택시를 불러야 했다. 이것은 단순한 교통 계획이 아니다. 이것은 '누가 이동할 권리가 있는가'를 무언으로 결정하는 차별이다. 새로운 도시계획은 이런 은밀한 차별구조를 허물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첫째, 공간 분리 지수 도입. 모든 도시계획에는 인종, 국적, 소득별 공간 분리 지수를 도입하고, 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주민과 지역민이 서로 고립되지 않는 혼합구역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 이주민 참여 도시설계. 이주민이 도시계획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들이 필요한 시설, 불편한 공간, 개선이 필요한 교통체계를 직접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다문화 공유공간 의무화. 모든 신규 개발사업에는 반드시 다문화 공유공간을 포함하도록 해야 한다. 이주민과 지역민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중립적 공간이 필요하다. 넷째, 번역된 공간 디자인. 도시의 표지판, 안내문, 공공시설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언어는 공간을 읽는 첫 번째 도구다. 읽을 수 없는 공간은 이미 배제의 공간이다. 다섯째, 문화적 상징물의 다양화. 도시 곳곳에 있는 기념물, 조형물, 광장의 이름은 더 이상 단일민족의 상징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반영해야 한다. 공간의 상징은 그 공간에 누가 속하는지를 무언으로 말한다. 도시는 결국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물리적 공간이다. 그 답이 '모두의 것'이라면, 도시계획은 그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이것은 도시계획가의 윤리적 의무다. "다름에 대한 환대." 이 문장은 시(詩)가 아니라 계획이어야 한다. 도시가 이 문장을 도면으로 그릴 수 있을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이주사회를 갖게 될 것이다.
2025.05.04.(일)
호명읍 山合里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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